2013년 5월 9일 목요일

## 허준의 고향은 경상도 산청이 아닌 전라도 담양


"허준의 고향은 경상도 산청이 아닌 전라도 담양"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허준, 그 불편한 진실 ③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09-08-12 오전 9:33:58



앞에서 허준의 스승은 소설, 드라마의 허구의 인물 유의태도, 상관이었던 양예수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허준의 스승은 누구일까? 일단 허준의 스승을 찾기 전에 그의 삶부터 살펴보자. 여기서 우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친다. 의사가 되기 전 그의 삶이 베일에 싸여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합의가 된 사실부터 몇 가지 짚어보자. 흔히 소설, 드라마의 영향으로 허준이 경상도 산청을 무대로 의학 수업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정작 허준이 태어난 곳은 경기도 양천(서울 강서구 가양동)이며, 그가 성장하고 의학 수업을 받은 곳도 경기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 그런가?

허준의 아버지는 허논이며, 어머니는 전라도 담양 출신 영광 김 씨로 소실의 자식이다. 허준의 형제는 허징이 있었으며, 배다른 형제로 본처 소생의 허옥이 있었다. 당시 양천 허 씨는 한강 어귀로부터 임진강을 따라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경향이 있었다. 또 그의 묘소가 경기도 파주군 진동면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의 가족은 경기도가 활동 무대였다.

심지어 허준은 20대 이전까지는 경상도가 아니라 외가인 전라도에서 성장했을 가능성도 크다. 당시 보통 17세까지 결혼 후 거처, 출산이 모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보면 외가인 전라도 담양이 허준의 출생, 성장과 관계가 깊다. 특히 그를 천거한 유희춘의 활동 무대가 담양, 해남이라는 사실, 또 남원의 신흔을 진료한 기록 등을 염두에 두면 허준은 오히려 경상도보다는 전라도와 더 연고가 깊었다.

그는 의사로 성공한 뒤에도 전라도 지방의 우황을 내의원에 진상하거나, 선조의 진료 현장에서 나주 출신의 허임을 극찬하는 등 전라도 지역색을 숨기지 않는다. 허준과 경상도 산청과의 관계는 '말 그대로' 허구의 인물 유의태와 연결시키면서 나온 것으로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 허준은 20대 이전까지 전라도 담양에서, 그 후에는 경기도 지방이 활동 무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프레시안
이 정도가 허준의 40대 이전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전부다. 이제부터 그가 젊은 시절 어느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의학을 배웠는지 어디까지나 추론을 할 수밖에 없다. 일단 열쇠는 그가 남긴 <동의보감>이다. <동의보감>은 기존 한의학 책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 번째 특징은 정기신론에 의한 한의학 이론의 재구성이다. 두 번째는 민족 의학의 재발견이다.

우선 <동의보감>의 철학적 기초인 정기신론이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인지 추적해보자. 흥미롭게도 <동의보감>은 음양오행을 언급하지 않는다. 당대의 의학 전통이던 남, 북의 모두 유학과 밀접한 음양오행의 논리를 한의학의 진료, 치료의 설명 도구로 삼았던 것과는 큰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동의보감>은 이렇게 남, 북의 전통에 기반을 둔 한의학을 해체하고 음양오행 대신 도가에 기반을 둔 '정기신'의 새로운 관점에 입각한 동의를 세웠다. 실제로 정기신론은 중국 한의학 서적에서는 보기 힘든 논리 구조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면 정기신론은 바로 면면히 흘러온 전통의학일 가능성이 크다.

이런 논리를 주도한 인물이 바로 <동의보감>의 초기 편찬위원 중 한 명인 정작이다. 정작은 편찬위원 중 유일한 유학자였는데, 이런 도가의 입장을 주장했던 것. 정작이 도가 수업을 받았던 스승이 바로 박지화다. 미수 허목은 정작의 행적을 놓고 "고옥 정작은 수암 박지화를 따라서 금강산에 들어가서 여러 해를 수련하였다"고 쓰고 있다.

16세기 중후반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이북 지역에는 이른바 유학 외에도 도가, 불교 등과 소통한 유불선 삼교회통의 사상이 서경덕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박지화도 바로 이 서경덕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도가, 양생법 등에 매우 해박했을 뿐만 아니라, 정작과 같은 후학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즉, 서경덕-박지화로 이어지는 사상이 <동의보감>의 이론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지난 글에서 설명한 것처럼 <동의보감> 편찬위원회가 정유재란으로 해체된 후, 허준은 단독으로 <동의보감>의 저술 작업을 계속한다. 전체적인 기획만 있는 상태에서 허준이 정기신론과 같은 도가에 조예가 깊지 않았다면, 애초의 기획을 구체화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즉, 허준 역시 정작 못지않게 도가에 소양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미암일기>에 언급된 허준의 30대 초반에 관한 유일한 기록을 보면, 허준이 <노자>, <조화론> 등의 책을 지인에게 선물한 정황이 나온다. 이 대목만 놓고 보더라도 1568년 30대 초반의 허준이 도가에 상당히 경도돼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허준의 주무대가 경기도였음을 방증한다.

당대에 허준에게 이런 영향을 줄 정도로 도가에 조예가 있었던 사람은 서경덕, 박지화 뿐이다. 생몰 연대를 따져봤을 때, 허준이 서경덕(1489~1546)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정작의 스승이었던 박지화로부터 허준이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허준의 진짜 스승이 과연 박지화였는지, 좀 더 꼼꼼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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