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9일 목요일

## 우리 역사에서 본 호남(전라도) , 영남(경상도)

출처 블로그 > kiroroman님의 블로그
원본 http://blog.naver.com/kiroroman/40025119301
글 : 폴리티즌 / 이내훈

삼국시대 때 고구려의 공격으로 존망의 위기에 처한 신라는 백제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고구려 세력을 한강유역에서 몰아낸 후 신라는 다시 백제를 배신하고 공격해 한강유역을 뺏어갔다.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이후 삼국통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신라는 당나라와 손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방을 당나라에 헌납했다. 그리고 몇백년 동안 번영을 누렸다. 신라의 번영은 곧 한민족의 위축과 굴욕을 의미했다. 신라의 삼국통일 즉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은 곧 만주와 중국 북부지방 그리고 중국의 해안지방 나아가 일본 지역이 우리나라의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그래도 백제의 옛날 강역 특히 전라도 진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청해진의 해상 세력은 과거 아시아 최강의 해상 제국 백제의 위용을 어느 정도 되살려냈다. 신라 정권은 여기에 전혀 도움을 준 것이 없다. 이것은 전라도 민중들의 힘이었다. 하지만 신라 중앙정권의 추잡한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패잔병들이 청해진에 찾아와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고, 그의 도움을 얻어 신라의 중앙정치무대에 복귀, 정권을 잡았다.

이들은 약속을 어기고 오히려 청해진과 장보고를 몰락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 사건으로 백제 멸망 이후에도 연면히 이어져오던 아시아 해양세력의 패자로서의 호남 근거는 사라졌다. 신라 그리고 영남은 항상 호남에게 손을 벌리고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한 후 배신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견훤이 경주를 공격했던 것은 호남 민중들의 신라정권에 대한 이런 처절한 분노를 담은 행위였다.

영남이 가장 장기로 삼는 것은 배신하는 것 외에 모함하고 뒷통수를 치는 것이다. 이들은 새로 등장하는 고려 정권에 대해 거의 창녀와 같은 비굴한 짓으로 고려 지배세력에 편입되어 들어간다.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이 가장 주력한 것은 고려 정권 내부에서 호남 세력을 몰아내는 일이었고, 나아가 고려라는 나라 자체를 철저히 중국화시키고 사대주의에 물들이는 일이었다. 이것은 영남의 몇천년 전통이다. 외세에 빌붙어 동족을 공격하고, 외세의 힘을 빌어 동족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다지는 것. 이것은 이제 전통이라기보다 이들의 천성,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정권에서 호남 몰아내기의 결정판이 훈요십조 조작이다. 이들의 비굴함은 상상을 초월하고,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다. 이 조작된 이데올로기는 다시 영남 출신 지식 장사꾼들에 의해 대대로 확대재생산된다. 이들의 호남 모함, 호남 공격은 몇십년, 몇세기의 사건이 아니다. 한국 역사의 출발 이래로 되풀이되어온,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이들의 정책이다.

고려의 국가 이념은 사실 고구려 노선의 재건이었다. 묘청과 정지상 등이 바로 그런 노선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김부식 등 신라 즉 영남 출신 귀족들은 갖은 수법을 동원해 고구려 재건론자들을 제거하고 고려를 중국의 속국 내지 사대주의 노선으로 이끌어간다.

고려의 무신정권에서 가장 패악스러운 세력들은 바로 경주에 기반을 둔 무신들이었다. 이들의 잔인한 행각은 고려사에 잘 기록되어 있다.

몽고의 침입 이후 고려는 몽고에 복속했지만, 삼별초는 끝까지 저항했다. 그 근거지가 바로 진도이다. 왜 하필 진도 등 한반도 서남해안과 호남 지역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외세에 대한 최후의 저항기지로 남곤 하는지 궁금하지 않은가? 이걸 그저 우연이라고 우길 것인가? 되풀이되는 우연은 아직 인과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필연의 발현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고려 말기에 들어오면서 왜구의 침입이 한반도 남해안 전역에 걸쳐 극심했지만 그걸 최종적으로 마무리짓고 왜구의 침략에 종지부를 찍은 궁극적인 승리는 바로 호남 지방에서 이루어졌다. 최무선의 활약 그리고 황산전투가 그것이다.

임진왜란으로 건너오자. 충무공의 지도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충무공은 북관 지방에서도 근무했고 공적을 쌓았지만, 호남지방에서와 같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의 난중일기 기록을 살펴봐도 그의 전쟁 대비, 전함 제작, 바다와 날씨 및 조류 등 전투의 결정적인 정보 제공, 병참과 보급, 전술 조언 등이 모두 호남 민중들의 도움을 얻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 있다.

진주성 항전이 경남지방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그 주력 장수나 병력들이 모두 호남 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심지어 진주성 혈전의 대미를 장식하는 논개조차도 전북 출신 여성이다. 행주대첩에 호남 병력들이 참여해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사실도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다.

임란 당시 호남만이 일본의 침략을 허용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호남의 저항이 치열했던 것이 아니라, 영남을 비롯한 한반도 다른 지역이 곡창지대인 호남을 보호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주었기 때문"이라며 헛소리 삑삑대는 허접들이 있다. 이런 허접들에게 물어보자.

그렇다면 당시 경기도나 수도 한양 등은 호남보다 중요성이 떨어져서 보호를 덜했나? 평상시에 영남이 없으면 한국이 망할 것처럼 지랄하더니, 임란 당시에는 영남이 없어져도 되는 땅이었던 모양이다.

조선 말기 동학혁명도 마찬가지다. 전봉준 장군과 기타 동학 혁명군의 주력이 어디인가? 영남인가? 긴 말 하지 않겠다.

일제가 호남에 대해 얼마나 공포심과 굴욕감을 느끼고 있었는지는 조선 말기 호남지역을 대상으로 전개한 '청야작전'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이 작전은 한반도의 서남지역 즉 충청도 이남 지역을 일본군이 거의 횡대로 늘어서서 휩쓸고 지나가는 방식이었다. 특별한 저항이 없어도 당시 일본군들은 마을에 들어가 살륙과 방화를 되풀이했다.

청야작전(淸野作戰, 즉 깨끗이 휩쓴다는 의미)을 지시하는 일본군의 내부 문서에는 이런 표현이 나와 있다.

'임진년 이후 이 지방(호남)은 황군의 위력을 맛보지 못해 내지인(일본인)의 위세를 우습게 보는 성향이 강하고, 저항적이다. 제국이 한반도 지배를 안정적으로 영위하려면 가장 먼저 이 지역의 이러한 기질을 억누르고 꺾어 반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긴급하다. 이번 작전은 바로 그러한 의도에서 진행되는 것이니 최대한 작전에서 온정을 베풀지 말고, 엄정 혹독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일본 식민 지휘부의 이러한 판단은 정확하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이렇게 호남 민중의 민족주의적 성향, 자주독립적 성향을 파악해 그것을 짓누르는 데 전력을 기울였고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일제시대 가장 대표적인 저항운동의 하나인 광주학생운동이 터져나온다.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사건이 영남에서 일어난 적이 있는지 알고 있으면 소개해달라.

일본의 식민지배는 8.15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아직도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있는, 한국사의 수수께끼 가운데 하나이다. 일제는 한반도에서 물러가면서 어떠한 조치를 취했는가? 일제가 패망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당시 친일파나 협조적인 조선인들에게 여러가지 공작을 했던 사실은 여러가지 자료에서 단편적으로나마 드러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반도의 지배권을 새로 장악한 미군정 당국에 대한 정보 제공이다. 이들은 40여년에 걸친 한반도 식민지배의 경험과 노하우를 담은 자료와 정보를 미군정 당국에 제공한다. 물론 그 자료들은 철저하게 일제의 시각에서 수집 가공 작성된 것이었다. 그 자료에는 한반도를 '외세의 입장에서' 지배하기 위해서는 어떤 세력과 손잡고, 어떤 세력을 공격하고 고립화시키며, 어떤 세력을 중립으로 돌려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와 조언이 담겨 있었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런 정보는 자료의 형태로 그리고 한반도에 남아 있던 친일 엘리트(관료, 학자, 교육계, 경제계, 예술계, 군부 등)들을 통해서 미군정 고위 실권자들에게 전달된다.

그렇다면 그 정보가 호남의 기질이나 식민지배에서 호남인들이 한 역할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정보를 담고 있었으리라는 사실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감히 추정한다면 가장 식민지배에 호의적이고 역사적으로도 그런 전통을 갖고 있는 영남 출신들을 식민지배의 파트너로 끌어들이고, 호남은 철저히 적으로 돌려서 고립시키며, 나머지 지역은 영남의 헤게모니 아래 복속하도록 하라는 조언이 담겨 있을 것이다.

박정희를 둘러싼 수수께끼도 바로 이런 시각에서 보면 풀리게 된다. 박정희는 남로당의 군부내 프랙션이었고,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친형인 박상희가 이미 좌익활동을 하다가 우익 세력과 경찰들에 의해 살해된 배경을 갖고 있었다.

그런 박정희가 비록 군부내 남로당 세력의 명단을 팔아넘겼다고는 하지만 목숨을 구하고 심지어 나중에 다시 군부에 복귀하며 군부내 후배들의 신망을 받는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박정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결말은 그저 '목숨을 구하는 것' 정도였다. 그런데 목숨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군대에 복귀하고 나아가 장군에까지 오른다? 도대체 어떠한 힘이 작용해서 그의 이러한 기막힌 역전 드라마를 써내려간 것일까?

박정희가 군부에 복귀한 보직도 의문이다. 군에서 쫓겨났던 박정희가 복귀한 곳은 바로 정보 파트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보안사령부 정도의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김종필 등 나중에 5.16의 주체들을 만나게 된다.

빨갱이 출신 프락치, 죽으려다 목숨을 건진 인물을 군대에 복귀시킨 것도 부족해 정보파트의 업무를 맡긴다?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얘기인가? 당시 우리나라 군대가 그렇게 허술했을까? 그렇게 허술한 군대가 어떻게 남한의 좌익세력을 소탕하고 또 군대 내부 프락치들을 적발해낼 수 있었을까? 그리고 설혹 한국군은 그렇게 허술했다 해도 당시 한국군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던 미군 당국도 그렇게 허술했다는 얘기인가?

미군은 해외 식민지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 식민지 현지의 엘리트 가운데 일부를 현지 대리인으로 양육하곤 한다. 상황에 따라 쓸모가 다한 대리인을 폐기처분하고 후보 가운데 적당한 인물을 골라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고 자신들의 행동을 대신해줄 에이전트로 내세우는 것이다. 박정희는 바로 이런 에이전트 후보로 양육되었다고 봐야 한다.

비겁하고 야비하며 기회주의적인 성품의 박정희가 오히려 군에 복귀한 후 청렴결백하고 소신있는 지휘자의 이미지로 후배들에게 비춰진 것도 철저한 이미지 관리의 소산이었다. 그런 이미지는 박정희가 당시 부패한 한국군 지휘부에 대해 '쓴소리'를 과감히 내뱉는 행동으로 잘 알려지면서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저런 반골 행위는 자신의 경력이나 행위에 자신이 있고 별다른 하자가 없는 인물만이 할 수 있다. 뭔가 약점이 있는 인물은 아무리 머릿속에 저런 생각을 품고 있다 해도 입밖에 내뱉기 어렵다. 자신의 과거가 발목을 붙잡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군대의 모든 사람이 부패한 군대 지휘부에 대해 반발한다 해도 박정희는 결코 그럴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빨갱이 경력이 화려한데다, 그 경력 때문에 끊임없는 감시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박정희가 군대 내에서 계속 자리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기적적인 일이라고 봐야 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언행을 했다가는 언제 다시 붙들려가서 빨갱이라는 명목으로 감옥에 가게 될지 모르는 처지였다. 이것은 결코 가상의 위협이 아닌, 실제적인 위험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는 부패한 군부 지도자들에게 쓴소리를 서슴치 않고, 반항을 거듭한다. 이건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박정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인이라서? 그렇다면 그런 의인이 왜 남로당 프락치로 붙잡혀갔을 때 혼자만 살아남기 위해 동지들을 팔아넘겨 다 죽음으로 몰아넣었을까?

백번 천번 양보해 설혹 박정희가 그런 의인이라고 해도, 그런 박정희의 반항적인 언행을 당시 한국군 지휘부는 왜 방치했을까? 당시 빨갱이 사냥꾼으로 유명했던 김창룡 등 서슬푸른 인물들의 눈에는 박정희의 언행이 전혀 보이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김창룡이 평소 박정희를 의심하고 못마땅하게 여겨 잡아넣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언도 나와 있다. 그런데도 김창룡은 그런 행동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왜? 증거가 부족해서? 하지만 김창룡의 행동이나 수사방식을 보면 원래 증거란 건 붙잡아다 족치면서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박정희의 경우는 증거를 새로 만들 필요도 없었다. 과거의 경력에 최근의 언행 한두가지만 결합하면 바로 '그림이 만들어지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김창룡은 박정희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을까? 심지어 5.16을 앞두고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이 당시 군부 지휘관과 정권 내부에까지 알려졌음에도 당시 군부와 정부는 여기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당시 한국 상황을 돌이켜보면, 그리고 나중에 이 박정희라는 인물이 한국사와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 역할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정말 우리나라 현대사의 핵심 수수께끼라고 느껴지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박정희는 미국이 양육한 에이전트 후보 가운데 하나라고 봐야 한다. 그리고 이 후보를 이용해야 할 때가 오자 이용했고, 그리고 쓸모가 다하자 1979년 10월 26일에 용도폐기한 경우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용도폐기되었어도 아직 용도폐기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로 미국의 한국 지배에서 영남이 담당하는 역할이다. 지금까지 벌어지는 모든 사태는 바로 미국이 일본을 한국 지배의 파트너로 삼고, 그 파트너의 하위 파트너(sub-partner)로 영남을 선정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한다.

노무현은 영남 내부의 헤게모니 다툼에 밀리자 호남을 찾아와 손을 내밀고 도움을 청한 경우이다. 마치 청해진의 장보고를 찾아온 경주 귀족을 연상시킨다. 이후의 전개 과정도 똑같다. 호남을 이용해 권력을 잡았고, 권력을 잡자 마자 배신했다. 그리고 호남 죽이기를 통해 권력을 유지 재생산하려 한다.

배신하고 모함하며 뒷통수를 치는 것, 그런 행위를 통해 권력을 잡고 조국의 민중을 배반하고 그 생존권을 외국 세력에 팔아넘겨 자신들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것... 이것은 영남의 전통이다. 아니 전통이라기보다 이제 제2의 천성, 본능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조선 말기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결정적으로 조선이 망하는 길을 열었다. 그러한 과정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계속 되풀이된다. 영남은 항상 조국의 미래를 팔아서 자신들의 번영을 사들이곤 했다.

영남이 득세하면 한국이 망한다. 영남이 한국사에서 득세하는 과정은 바로 한국의 패배와 굴욕, 대외 종속이 심화되는 과정이었다. 영남은 그러한 자신들의 전통과 능력을 자랑하고 과시한다. 하지만 사람 몸속의 기생충이 번영하고 득세하는 것이 과연 자랑이 될 수 있는가? 우리나라와 영남의 관계는 사람과 거기 기생하는 기생충의 관계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호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충무공의 '호남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는 언급은 시대를 뛰어넘는 진실을 꿰뚫고 있다. 호남은 항상 조국의 편에서 싸워왔다. 그 싸움은 어떤 때는 동학의 깃발을, 어떤 때는 독재타도, 어떤 때는 민주화의 깃발을 내걸지만 본질에 있어서 항상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담곤 한다.

그래서 영남은 항상 호남을 싫어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외세 의존이야말로 영남이 살아남고 영남이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면서 조국의 민중을 괴롭히고 착취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충무공은 '내게 아직 배 12척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나는 호남에 무엇이 남아있는지 잘 모른다. 다만 우리 조국에 아직 호남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아무리 영남이, 노무현이 짓밟고 모욕하고 쓰러뜨리려 해도 아직 호남은 살아있다. 그래서 희망이 있다.

호남이 사라지면, 패배하면 이 나라에 희망이 끊어진다. 지금 노무현은 그것을 노리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사실 노무현이 기획하고 박근혜가 감독한 드라마라고 봐야 한다. 결과적으로는 영남 패권의 회복이 그 드라마의 궁극적인 결론이다.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목숨이 남아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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