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27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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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와 전라도 중 어느곳이 조선시대에 반역향으로 더 오래 찍혔었나요? 내공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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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8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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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 났고 그때마다 그 반란이 일어난 지역이 일정 기간 반역향으로 찍히기도 했다고 해요.  경상도와 전라도도 그 예외는 아니었었다고 하네요. 제가 궁금한 점은, 이 두 지역 중 어느쪽이 더 오랜 기간 반역향으로 찍혔었으며, 또 그렇게 되었던 연유는 무엇인지요. 내공 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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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 경상도입니다.

mklee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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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9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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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 인사

정말 대단해요! 당신의 지식에 감탄하고 갑니다.^^ 똑 소리나게 새로운 사실에 눈뜨게 합니다. 자세하고도 납득 가는 답변이십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가 반역향으로 찍힌 기간은 135년간으로서,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찍힌 기간 3년의 무려 45배나 되었었습니다. 

경상도에 대한 차별은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시작하여 1863년 대원군이 집권하여 탕평책을 실시하기 까지 무려 135년간이나 지속된 반면, 전라도에 대한 차별은 1589년 (정여립의 난)에 시작하여 1592년에 임진왜란 발발 직후를 즈음하여 끝났으니 고작 3년여간 지속된 셈입니다.  전라도에 대한 차별이 이렇게 신속하게 끝난 데에는 전라도가 왜란 도중 항왜(抗倭)의 거점으로 구실하고 전라도 의병과 이순신 휘하 수순의 활약이 왜군을 퇴치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중요한 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일례로, 정유재란 이후 선조 30년 2월 선조는 다음과 같이 말 하였습니다:

"멀리 있는 남도의 백성들아 짐의 말을 들을 지어다. (중략) 지난 기축년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도내의 걸출한 인물들을 뽑아 쓰지 아니하여, 그윽한 난초가 산고짝기에 홀로 향기를 뿜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옥이 형산에 자취를 감추었었도다. (중략) 이제야 난을 당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고자 하니, 그대들 보기에 부끄러움에 얼굴이 뜨겁도다."

또한, 이순신 장군이 왜란중에 공공연히 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 없이는 나라도 없다)고 하신 것은 당시 나라를 구함에 호남의 역할이 얼마나 중차대했음에 조야를 막론하고 이론이 없었음을 반증합니다.  만약 조정의 분위기가 그때까지도 "호남 반역향" 운운하는 분위기였더라면 충무공이 아무리 호남의 공헌을 체감 했었더라도 공공연히 그런 발언을 할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왜란 종결 이후 많은 세대가 지난 후, 정종이 전라도를 두고 하신 最名賢節義之鄕 (최고로 유명한 선비와 절의의 고장이로다)이라는 칭송도 당시 호남 선비의 조정등용이 얼마나 왕성했는지를 말해 준다 하겠습니다. 

반면, 경상도는 영조의 전왕인 경종을 영조가 독살했다는 유언비어를 빌미로 경상도 남인이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으킨 1728년의 무신난 (戊申亂), 즉 이인좌의 난 이후 무려 135년이 지나 대원군이 집권하여 탕평책을 쓸 때까지 "반역향"의 라벨을 붙이고 살아야 했습니다.  영조의 경상도에 대한 철저한 배척은 그가 닌 평정 후 대구에 세운 "경상도를 평정했다"는 의미의 평영남비(平嶺南碑)가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또 영조 이래로 경상도 출신 당상관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은 그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를 말해 줍니다.  벼슬길에서 소외된 경상도 선비들은 135년간 서원에 모여 공리공담 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헐린 서원은 경상도가 전국 최다였던 점이 말해줍니다.) 

참고로, 순조,철종대에 소위 세도정치를 편 안동김씨는 언뜻 보기엔 경상도 기반인듯 하나 사실은 전혀 경상도 지역하고는 연고의식 자체가 없었습니다.  "안동" 김씨가 그 시조라 하여 명목상 안동김씨라고 불리웠지 실은 한성에 토착한지 수백년된 서울 문벌로서 서울 장동에 집거한다 하여 "장동 김씨"라고 자타가 일컬었습니다.  그래서 소위 안동김씨 세도 기간 중에도 그들은 지역단위로서의 경상도 차별 시정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려 135년간 경상도가 반역향으로 찍히고 경상도 선비의 벼슬이 철저히 엄금 됐던 계기가 된 이인좌의 난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조선 후기 경상도 차별의 시발점 이인좌의 난>

이인좌의 난 시발점은 1717년 조선의 19대왕 숙종의 소위 "정유독대"로 거슬러 올라 갑니다.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 세자 균 (후일의 경종)이 병약한점을 우려하여 경종 사후 자신의 또다른 아들 연잉군 (후일의 영조)가 대를 잇는걸 확실히 해달라고 노론 영수 이익명에게 부탁한것이 바로 정유독대입니다.  숙종 사후 노론은 숙종의 유지대로 연잉군을 세자로 세우며, 연잉군은 급기야 일찍 죽은 경종 뒤를 위어 왕위에 오르니 바로 영조입니다.  영조의 즉위로 정치적 기반이 위태롭게 된 소론, 그중에도 과격세력은 숙종대의 "갑술환국" (인현왕후 복위문제로 서인이 남인 축출하고 집권한 사건)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과 공모하여 영조와 그 주변 노론을 제거할 음모를 꾸밉니다.  경종을 영조가 독살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그것을 빌미로 영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장의 증손 밀풍군 탄을 세울 모반을 도모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모반계획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영조가 뜻밖에 소론 정권을 들여 세우자  명분이 없어 지고, 동조자도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급기야는 조정에 고변됨에 이릅니다. 기밀이 누설되었음을 안 반역 세력은 더 이상 지체 할 수 없어 이인좌가 선봉이 되어 반란의 깃발을 듭니다.

<이인좌 난의 평정과 "반역향"으로서의 경상도 차별 시작>

1728년 3원 15일. 스스로 대원수를 칭한 이인좌는 청주성에 진입해 충청 병사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을 점령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 지자 경상도의 전역이 일제히 호응하였는데,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 이응보, 인척 조성좌와 함께 경상도 합천과 함양을 점령합니다.  그러나 그 기세를 타서 북상하던 경상도 반란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대패하고, 청주성도 도로 빼앗긴 후 이인좌를 비롯한 반란 주도 세력이 생포되자 반란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 사건에 분개한 영조는 대구 감영 입구에 평영남비를 세우고 이 사건을 경상도 지역의 반란으로 규정 짓습니다.  나아가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지목해 일체의 과거 응시를 금지시키고, 앞으로도 절대 등용 말라고 유시하는 초강경 조치를 취합니다.  영조 10년 이조판서 송인명이 "영남사람은 비록 추천되더라도 낙점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라고 하며 영남 차별에 문제 제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또 영조 13년에는 좌의정 김재로가 "조정에서 영남인에 대한 대우를 다른 道와 다르게 함은 마땅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이니, 그 차별이 얼마나 극심했는 지를  말해 준다 해겠습니다.

영조가 이인좌의 난을 경상도 반란으로 규정지을 정도로 온 경상도가 벌떼 같이 반란하여 일어 난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경상도가 남인 지역이며 이인좌 본인이 소론 이면서 경상도 남인 윤휴의 손자사위이기도 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영조는 경상도의 반란 호응을 경종 신원을 빌미로 정권을 한번 잡아 볼까하는 기회주의적 작태로 꿰 똟어 본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일 이후로 남인의 등용은 제한 되었고, 비록 이 난에 직접 연관이 없었다 해도 경상도 출신은 일종의 "연좌제"에 묶여 출사나 진급을 금지당했습니다.  영조 13년 병조판서 민응수가 "영남의 풍속이 벌써 변하여 옛날의 경우 모두 남인이었는 데, 지금은 그중에 더러 갈리어 나간 자도 있습니다"고 한것은 경상도가 얼마나 남인 일색이었는지, 또 영조가 얼마나 경상도와 남인을 한 묶음으로 반역집단시 했는지를 반증 해 준다 하겠습니다.이러한 영남 차별은 영조,정조 대는 물론 순조, 철종을 이어 고종 즉위와 함께 대원군이 집권하여 탕평책을 쓸때까지 무려 135년간 거의 조선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경상도가 반역향으로 찍힌 기간은 전라도가 찍혔던 기간 3년여의 무려 45배였던 점을 감안하면, 경상도는 조선시대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반역향이었음을 결론 내릴 수 있다 하겠습니다.



mklee2007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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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경상도와 전라도 중 어느곳이 조선시대에 반역향으로 더 오래 찍혔었나요?

erai_bak01 
답변채택률84.5%
 
2009.12.08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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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변하겠습니다.



 먼저 "조선시대에는 각지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큼직한 반란은 '이시애의 난', '이인좌의 난', '홍경래의 난' 등 손에 꼽을
정도였고, 장길산이나 임꺽정등 도적의 소요나~ 각지의 [민란(民亂)]은 반역의 의도를 가지고
일어난 [반란]의 개념으로 보기는 힘들어요^^; 특히 민란의 경우는 지방관의 탐학에 따라
일어나기는 했지만~ 조정의 관리를 죽여 '반정부'적 성향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탐관오리를 짚자리에 싸서 고을 밖으로 추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때문에 조정에서도
주동자에게만 처벌을 내렸고, 해당 탐관오리도 갈아 치우거나 처벌했죠ㅎㅎ;;

 조선시대의 지역차별에 대해서 궁금하신듯한데~ 조선왕조는 초기부터 '북도(北道)', 즉 함경도와
평안도에 대해 정치적으로 금고(禁錮, 관료등용의 길을 제한함)하는 조치를 취했고, 이는 '이시애의 난'
과도 관련이 깊습니다!!! 전라도의 경우는 선조 때의 '정여립 모반사건' 이후 반역향으로
낙인찍혔고, 경상도의 경우는 영조 때 일어난 '이인좌의 난' 이후로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나
차별받게 되죠...ㅡㅡ; 이에 따라 조선후기에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은 '경화사족
(京華士族)'으로 불리던 서울의 명문가와~ 서울과 가까웠던 충청도 지역의 사대부들
이었습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놓고 보면,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낙인찍힌 시기가
약 140여 년 앞섭니다...



 전라도가 이런 상황이 된 것은 1589년에 일어난 '정여립 모반사건'이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西人)'이었는데~ 나중에 '동인(東人)'으로 전향했고, 서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이와 스승인 성혼을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이일로 왕의 눈밖에 난 정여립은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전라도 진안(鎭安)으로 내려갔으며~ 이곳에서 호남의 동지와 지인들을 규합하여 '대동계
(大同契)'라는 정치적 결사를 만들게 되죠. 그런데 이 대동계는 정치적 성격은 물론이고,
무력까지 갖춘 집단으로~ 손죽도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칠 정도였습니다!!! 게다가 그 조직이
각지로 확대되었고, 무력기반도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해갔죠. 

 이를 빌미로 1589년에 황해감사 한준 등이 연명으로 정여립이 모반을 꾀한다고 고변했고, 
조정의 서인들이 주축이 되어 모반의 증좌도 없이 정여립과 그 결사를 [역모]로 간주하고,
그와 관련있는 사람들을 모두 연루시켜~ 무려 1000여 명의 동인과 호남인사들을 숙청하게
됩니다...ㅡㅡ; 이 사건을 '기축옥사(己丑獄事)'라고 하는데, 이 이후로 전라도는 반역의 땅으로
간주되어 상당한 차별을 받게 되죠...ㅡㅡ;;     



 경상도의 경우는 1728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그 원인입니다!!! 숙종 때, 세자(훗날의 경종)의
왕위계승을 놓고 세자를 지지하던 '소론(少論)'과~ 세자의 이복동생인 연잉군(훗날의 영조)를 지지하던
'노론(老論)'이 대립합니다만, 결국 경종이 노론의 방해를 이겨내고 왕위를 이음으로써 소론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됩니다!!! 게다가 경종은 '남인(南人)'과 관련이 깊었던 희반 장씨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영남(경상도)에 기반을 두고 있던 남인들도 정계에 진출하게 되죠...^^;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승하하고, 노론이 밀던 영조가 즉위함으로써~ 소론과 남인들의 세력이 위축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영조와 노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에 소론의 과격파였던
이인좌가 충청도 청주(淸州)에서 거병함으로써 난이 시작되죠...^^; 그런데 청주의 이인좌 
뿐만아니라~ 경상도의 정희량이 이끄는 반란군도 안음(安陰), 거창(居昌), 삼가(三嘉), 함양(咸陽),
합천(陜川) 등의 고을을 함락했고, 영조와 노론에 불만을 품던 영남의 남인들이 대거 가세하여
기세를 올리게 됩니다!!! 이인좌의 반란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 경기도의 안성(安城)과 죽산(竹山)까지
올라왔으나~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대패했고, 정희량도 경상감사 황선의 관군에
격파됨으로써 난은 진압되고 말죠...ㅡㅡ; 이후 경상도는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차별받았고, 1788년에는
경상감영이 있던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 경상감사 황선이 영남의 반역자들을 평정한 전공을
찬양하는 비석)'가 세워지기까지 합니다...ㅡㅡ;;  



출처
 
인터넷 자료인용 + 본인 작성입니다...
erai_bak01
영웅
 
채택 322 (86.3%)
답변

re: 경상도와 전라도 중 어느곳이 조선시대에 반역향으로 더 오래 찍혔었나요?

zjq0707 
답변채택률0%
 
2009.12.08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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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아닌가요
zjq0707
시민
 
채택 8 (20%)
답변

경상도와 전라도 중 어느곳이 조선시대에 반역향으로 더 오래 찍혔었나요?

heliconmoon 
답변채택률74.8%
 
2009.12.08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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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향(異敵鄕)이라 합니다  

역사적으로 많은민란이 있었지만 대부분 역사에서 이를반란으로보는이유는  지배세력에대한 저항이라고판단 한것입니다 내용을 보시면알겠지만 대부분민란이 가렴주구와 학정에 못이겨 일으킨 농민반란 입니다 조선조에서  삼남지역을 가장 우려시한이유는 바로이 반란 세력을 항시 준동할수있다는것때문입니다
조선 조초기부터 삼남지방과 함경북도지역을 이적향이라 했습니다 사실상 경남지역이 역사적으로 민란이 더 많았지만 함북지역은 민란이 아닌 권력투쟁이기때문입니다

함경북도는 민란이란 단순한 생계형반란이 아니고 권력탐욕자들의 권력투쟁입니다
대부분 함북지역에서 훈련 거병하기좋은 지형이며 실패시 여진쪽으로 탈출하기좋은 루트이기때문입니다

답은 영남입니다  현대사에도 마산의거 -4. 19혁명 정부전복 이승만 하야 하와이 망명   1979년부마사태 박정권몰락
일어났다하면 정권이든 정부가 사라지는경우이기때문입니다  오히려 호남은 민란이 드문 이유는 영남지역은 호남에 비해 농토가 척박한원인 이있기도합니다  그래서 조선조말 간도 이주가 영남 사람이 많은이유입니다

고려조 조선조에서일어난 주요민란(농민) 반란사건입니다

망이·망소이의 난(亡伊亡所伊-亂)
1177년 고려 무인 집권 때 사회질서가 문란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 민란의 하나이다

명주 농민반란(溟州農民叛亂) 또는 명주 민란(溟州民亂)
고려 무신정권 때 명주에서 일어난 농민의 반란이다.
1199년(신종 2년) 명주에 초적(草賊)이 일어나 삼척·울진을 함락시키고 동경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주·군을 약탈하였다
고려 동경의 반란(高麗東京-叛亂) 또는 경주 민란
1190년(고려 20년) 이래 약 15년에 걸쳐 일어난 경상도 지방의 민란이다. 민란 중심지가 고려의 동경, 곧 경주였으며, 반란의 기치가 신라 재흥이었으므로 신라 부흥 운동으로 부르기도 한다.

김사미·효심의 난(金沙彌孝心-亂)
고려 명종 때인 1193년 울산 밀양 경남지역 에서 발생 김사미 세력과 효심 세력이 연합하여 일으킨 민란이다.

진주 노비반란(晋州-奴婢叛亂)
고려 신종 때인 1200년 진주에서 일어난 노비들의 반란이다.

조선후기 농민 반란
홍경래의 난(洪景來의亂)
1811년(순조 11년) 음력 12월 18일부터 1812년(순조 12년) 음력 4월 19일까지 홍경래·우군칙(禹君則) 등을 중심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넓은 의미에서의 농민 반란이다.

거창민란(居昌民亂)
1862년(철종 13년) 음력 5월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의 영향을 받아 경상도 거창현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이다

진주 민란(晋州民亂)
1862년(철종 13년) 봄 진주에서 일어난 민중의 봉기로 임술농민항쟁이라고도 불린다.

부안 민란(扶安民亂)
1862년(철종 13) 전라도 부안에서 일어난 민란이다

고부민란(동학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1894년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들에 일어난 민중의 무장 봉기



고려조 조선조 권력투쟁용 반란

김보당의 난(亂) 또는 계사(癸巳)의 난
명종 3년(1173년)에 고려의 무신인 김보당(金甫當, ? ~ 1173년)이 일으킨 난이다.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간의대부(諫議大夫) 김보당 이 주도한 반란

의주적의 난(義州賊-亂)조위총의 난
명종 4년(1174년)에서 6년(1176년)까지 서경 유수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반발하여 정중부·이의방을 치고자 일으킨 의주에서 일어난 반란이다

김순부·김숭의 난
1177년(명종 7) 의주(義州)·정주(靜州) 두 주에서 왕실에 불만세력규합 반란

만적의 난(萬積-亂)
1198년(신종 1년) 고려 무신 집권기에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노비 해방운동이다.


조선조
동북면의 난(東北面-亂) 또는 조사의의 난은 1402년 조사의(趙思義), 강현 등이 동북면(함경도)에서 일으킨 반란
태종이방원에대한 반역 태조 재옹립

이시애의 난(李施愛-亂)
1467년(세조 13년) 길주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이다.

이징옥의 난(李澄玉-亂)
1453년(단종 1년) 이징옥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부터 파직되자 스스로 대금황제(大金皇帝)라 칭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이괄의 난
1624년(인조 2년)에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었고,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무고까지 당하자 이괄이 일으킨 반란으로 한양까지 함락시켰는데, 조선대의 내부 반란으로서는 처음으로 왕을 도성으로부터 피난시킨 전무후무한 난이기도 한다. 그러나 후에 길마재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진압되었다

출처
 
나/역사자료인용
출처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1&docId=100532380&page=1#answer5